글렌데일 그레이스 교회 담임목사 정광욱
“고통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세계적인 의료 선교사 폴 브랜드 박사가, 그의 책 ‘고통이라는 선물’에서 한 말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의료 선교사로서 인도에서 20년을 사역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병환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아픔 가운데 살면서 고통 없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가족을 보내면서 ‘이제는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편히 쉬다가 다시 만나요’하며 서로 위로 합니다. 염려와 근심,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없는 곳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땅 사는 동안 겪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브랜드 박사는 고통이 저주가 아니라 고통이 없는 것이 저주라고 말합니다. ‘내 평생 가장 어두운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신을 벗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냈을 때, 발의 반쪽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감았습니다. 윗 셔츠 주머니에 있는 볼펜 끝으로 발꿈치를 찔러 보았습니다.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발꿈치에 뭐가 닿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마침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인가. 그 무서운 일이 나한테? 나병을 다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나병의 첫 증상 중 하나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젠 나도 나병을 치료하던 의사에서 나병 환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가. 옷 가방을 뒤져 바늘을 찾았습니다. 발목 바로 밑을 살짝 찔러 보았습니다. 아무런 통증이 없었습니다. 더 깊이 찔렀습니다. 검붉은 피가 흘렀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습니다. 바늘로 내 몸을 꾹 찌르면서 고통이 느껴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바라던 통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려운 밤이 지나고 마침내 날이 밝았다. 아침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병이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나는 병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감각이 없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을 찾아서 정밀하게 표시를 했습니다. 숨을 깊이 들여 마시고 바늘 끝으로 표시된 발꿈치를 푹 찔렀습니다. 순간 나는 “악”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심한 고통 가운데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최고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통증만큼 유쾌한 감각을 내 평생에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통 혹은 통증은 저주나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내 비즈니스, 내 가정,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이 두려움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꼭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가장 손쉽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일상 혹은 평범함의 소중함입니다. 함께 있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티를 마실 수 있었던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이제사 깨닫습니다.
가고 싶은데 마음대로 가서 운동을 하고 잔디밭이나 비치에 누워 있을 수 있었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뭉클 뭉클 솟아납니다. 그리고 마스크 쓰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만나고 난 뒤 손 쌔니타이즈로 손을 닦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진짜 내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큰 재난, 아무리 큰 전쟁의 소문이 들리더라도 낙심하지 말아라.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시작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재난의 시작이 아닙니다. 시작의 재난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재난의 고통은 파멸의 고통이 아닙니다. 해산의 고통입니다. 산고를 통해서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이 재난을 통해서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버릴 수 있는 것과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일의 우선순위, 소유의 우선순위, 무엇보다도 사람의 우선순위를 재고해 보고 그 순서를 바로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