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의사당 난입 사태에서 우리 눈을 의심하게 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클리트 켈러’라는 수영 선수입니다.
그는 한때 모든 미국인의 영웅이었습니다.
세 번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 2, 은메달 1, 동메달 2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금메달의 영광에 사로 잡혀 사회생활도 가정생활도 실패했습니다.
이혼 후 한동안 홈리스로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겨우 직장을 얻어 사회로 복귀했지만, 이번 사태에 참가하면서 반사회적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또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미국 육상선수로 금메달 3개를 딴 윌마 루돌프는 소아마비 장애인입니다. 그는 1940년 미국 흑인 가정에서 22명의 자녀 중 20번째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당시 몸무게가 2kg도 채 되지 않는 미숙아였습니다.
4살이 되던 해 폐렴과 성홍열을 앓게 되었고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윌마는 11세가 될 때까지 왼쪽 다리에 보조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보조기 없인 걷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지극히 정성으로 회복되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80km나 떨어진 내슈빌에 있는 대학병원에 버스를 타기도 하고 업고 가기도 해서 물리치료와 마사지를 받도록 했습니다.
의사에게서 물리치료법을 배워, 어머니, 언니, 오빠가 모두 동원이 돼서 하루에 적어도 네 번 윌마의 다리를 마사지했습니다.
덕분에 비록 절뚝거렸지만 걸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오빠들은 윌마가 11살 때 집에 농구대를 설치하고 윌마와 함께 농구를 했습니다.
윌마는 농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가장 우수한 농구선수 겸 단거리 육상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6년 멜버른 올림픽을 거쳐 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00m, 200m, 400m 릴레이에서 금메달을 따서 3관왕이 되었고, 100m 기록은 당시 세계 신기록이었습니다.
윌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상경기는 만인이 즐기는 스포츠라고 들었어요. 정부도, 세상 사람들도 육상을 키워야 한다고 했지요. 내가 월계관을 썼을 때 나는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었어요.”
관중의 함성과 매스컴의 관심이 사라졌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연봉 4천 달러의 국민 학교 체육교사 자리였습니다.
그는 22형제 중 스무 번 째였습니다. 대가족의 생계가 큰 문제였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비를 버느라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윌마는 두 번 결혼했으나 두 번 다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첫 번째 결혼은 내가 금메달을 따고 난 직후였어요.
남편은 내가 금메달리스트라는 그 이유만으로 나와 결혼했지요. 그 남자는 나를 이용해서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금메달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던 결혼도 얻은 그 순간일 뿐 영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윌마는 주저 않지 않았습니다.
영광의 순간에 머무르기보다 그 영광을 얻기까지 쏟아 부은 노력을 소중하게 만드는 일을 시작합니다.
돈 버는 일이 아니라 학교의 교사로, 대학 육상팀 코치 등으로 활동합니다. 특히 ‘윌마 루돌프 재단’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청소년 육상경기대회를 지원했습니다.
자신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후진들에게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광욱 목사